자비를 나르는 수레, 오지에서 끌다 - 오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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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eggy 작성일25-05-01 17:31 조회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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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오시환 살이었던 것 같다. 한 학년 위의 선배가 강의실에 들어와 야학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는데 후임자를 찾는다는 것이다. 나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내가 하겠다고 했다. 다음 날 선배와 함께 금호동 산꼭대기에 올라갔다. 야학 이름이 오시환 ;이었다. 그 후 1년간 일주일에 세 번씩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올라가 열과 성의를 다해 중학교 1 2 3학년 국어 전 과정을 가르쳤다. 상급학년이 되고,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내 아이를 오시환 낳고, 또 손주 보느라 ;은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다. 그때 함께 야학하던 선생님 한 분과 페친이 되어 일상을 공유하게 되었다. 봉화로 귀농했다고 하여 남편과 함께 ;에 놀러 간 적도 있었다. 그 분의 페북은 귀농한 오시환 이야기와, 캄보디아 국경마을에 학교를 세우고 봉사하는 이야기로 채워졌다. 나는 젊은 날의 열정이 이미 사라져 내 아이들과 씨름하느라 바빠 대충 읽고 말았다.;라는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페북에서 접하여 주문해 이제 막 읽었다. 물도 전기도 없는 오시환 황무지 땅에 초등학교를 세우고 우물을 파고 전기를 놓고 중학교를 짓고 공예학교를 지어 자비를 실천에 옮긴 16년간의 이야기다. 읽으며 이렇게 불가사의한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생각했다.하지만 나는 야학을 할 때부터 페친의 열정과 능력을 이미 알고 오시환 있었다. 모든 분야에 능력이 탁월하고 무엇보다 기획력이 뛰어났다. 페친은 젊은 날부터 윤동주 동상 앞에서 시를 읊던 시인이었다. 시인의 감성과 단아한 문장으로 326 페이지를 날짜 순서로 써 내려갔다.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이야기가 스릴감 있고 오시환 재미있어 순식간에 읽었다.페친은 스무 살 때, 일주일에 세 번 만나 자신의 이상과 꿈을 얘기하던 친구였다. 그와 어떤 식으로라도 얽히고설켰을 터인데 서로는 엮이지 않았다. 그 후 오십 년을 살아오면서 그것이 늘 이상하다 생각했었다. 이 오시환 책을 읽으면서 의문이 풀렸다. 페친은 지독한 이상주의이고 나는 지독한 현실주의였던 것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정기후원 계좌를 적어 놨다. 저 많은 일을 하도록 한 번도 후원하지 못했으니 이제 조금이라도 후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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