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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과 혁명, 그리고 운명 (上,下권) - 정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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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Robin 작성일25-05-17 00:01 조회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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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명한권 the DALL_E #문종 #단종 #소헌왕후 #현덕왕후 #문종과현덕왕후 #조선사 #조선왕조실록 #세종 #한국사 #한능검 #초등한국사 #중등한국사 #고등한국사 #역사블로그 #역사덕후 #한뼘더역사​​평범했던 소녀, 세자의 아내가 되다조선 초기, 서울 한양.한 가문에서 한 소녀가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바로 권씨, 훗날 조선의 비극적 왕비 현덕왕후가 됩니다.아버지는 청백리로 이름난 권전(權專).그녀의 가문은 귀족층은 아니었지만, 성품과 가풍이 단정해 궁중에서도 이름이 알려진 집안이었습니다.1427년, 권씨는 왕세자빈으로 간택됩니다.당시 나이 겨우 10세.『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과 소헌왕후는 권씨를 보고 이렇게 평했습니다.성품이 정숙하고, 공손하며 지혜롭다.그녀는 일찍부터 왕세자 이향(훗날 문종)과 맺어져,왕실 교육을 받고 운명한권 조선의 미래를 준비하는 여인이 됩니다.소헌왕후와 세자빈 권씨 – 진심으로 맺어진 시어머니와 며느리소헌왕후 심씨는 조선 역사상 손꼽히는 현명한 왕비였습니다.그리고 그녀는 권씨를 자신의 딸처럼 아꼈다고 실록은 전합니다.『세종실록』 세종 10년 5월왕비(소헌왕후)가 세자빈 권씨를 가르침에 공손하고 자애로웠으며,스스로 자녀와 같이 여겼다.​정례(定禮): 소헌왕후는 권씨에게 직접 정례(예를 정하는 의식)를 교육하며, 궁중에서의 위엄과 겸손을 가르쳤습니다. 특별 교지: 세종은 왕비 심씨에게 명하여, 세자빈의 일상생활 지도까지 직접 관할하게 했습니다.병중 간호: 권씨가 아이를 낳은 뒤 병을 얻자, 소헌왕후는 친히 빈소를 찾아가 약을 달이고 손수 간호했다고 운명한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종실록』 세종 23년 7월)“왕비가 세자빈의 병이 위급함을 듣고 눈물을 삼키며 침소를 지켰다.”이런 기록을 보면, 단순한 궁중의 ‘격식 있는 관계’가 아니라,진심으로 연결된 사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종(세자)과 권씨 – 조용하고 따뜻했던 사랑당시 왕세자였던 문종은 매우 총명하고 신중한 성격이었습니다.그리고 세자빈 권씨를 향한 애정은 여러 기록에서 은연중에 드러납니다.​책 읽는 시간: 세자는 권씨에게 직접 『효경』과 『논어』를 함께 읽으며, 그 의미를 설명해주었다고 합니다.(※ 실록에는 ‘세자가 빈과 함께 경서를 읽고 익혔다’는 표현이 등장)병중 간병: 권씨가 출산 후 위독했을 운명한권 때, 세자는 정사를 제쳐두고 빈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세종실록』 세종 23년 7월세자는 빈의 병세가 위급함에, 침소를 떠나지 않고 밤마다 곡하였다. 어린 생명과 함께 찾아온 이별1441년 여름, 권씨는 드디어 아이를 낳습니다.그 아기가 바로 훗날의 임금, 단종입니다.하지만 운명이 잔혹했습니다.권씨는 출산 직후 심각한 산후병에 걸렸고, 아들을 낳은 지 불과 8일 만에 세상을 떠납니다.『세종실록』 세종 23년 7월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왕세자빈 권씨가 아들 홍위를 낳은 뒤, 산후병으로 죽다.세자가 빈의 병세에 애통하여, 밤마다 곁을 지키며 울었다.​​권씨가 숨을 거두던 밤,왕세자 문종은 침소를 운명한권 떠나지 못하고, 관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통곡했다고 합니다. 세자는 영전에 무릎을 꿇고 통곡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전합니다.“하늘이 어찌 이리도 무정한가.”그녀는 살아서 왕비가 되지 못했고,사랑했던 이와 아들의 곁을 떠나야 했습니다. 문종은 왕이 된 뒤에도 왕후를 들이지 않았습니다.그리고 권씨를 현덕왕후로 추존하고, 능지에서 가장 좋은 땅에 의릉(義陵)을 조성해 그녀를 기립니다.​​​by the DALL_E #문종 #단종 #소헌왕후 #현덕왕후 #문종과현덕왕후 #조선사 #조선왕조실록 #세종 #한국사 #한능검 #초등한국사 #중등한국사 #고등한국사 #역사블로그 #역사덕후 #한뼘더역사죽어서야 왕비가 된 여자1450년, 세종이 세상을 떠나고 왕세자 이향이 조선의 5대 왕, 운명한권 문종으로 즉위합니다.왕위에 오른 문종이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바로,권씨를 왕비로 추존하는 것이었습니다.『문종실록』 문종 1년 1월상이 말하기를, 빈이 생전에 정비가 되지 못했음을 한스럽게 여겨, 정비로 삼고 시호를 내려 의릉(義陵)에 장사지냈다.그녀에게 내린 시호는 현덕(顯德).‘밝은 덕을 지닌 왕비’라는 뜻입니다.문종은 비석을 세우고, 능을 조성하여 그녀를 조선 왕후로 예우했습니다.비록 살아서 함께 걷지 못했지만,죽어서라도 그녀를 끝까지 자신의 반려로 삼은 것입니다.권력의 비극 – 무너진 무덤문종이 1452년 세상을 떠난 후,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왕실은 격랑에 휘말립니다.1453년, 수양대군(훗날 세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운명한권 정권을 장악하고, 권씨 가문은 몰락합니다.그 여파는 죽은 현덕왕후에게까지 미쳤습니다.1457년, 세조는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립니다.『세조실록』 세조 3년 7월그 어미는 부덕하니, 능호를 거두고 능을 파하고 민묘로 돌려라.이에 따라:현덕왕후의 의릉은 파헤쳐지고 석물은 치워지고 묘비는 부서지고 수호 인원도 철수합니다.백성들은 그 소식을 듣고 한숨을 쉬었습니다.죽은 사람에게 이토록 잔인할 필요가 있었는가라는 탄식이 퍼졌습니다. 다시 왕비로 돌아오다현덕왕후의 명예는 단종을 사랑하고 기억한 조카,성종에 의해 복권됩니다.1470년, 성종은 즉위 후 다음과 같이 명합니다.『성종실록』 성종 1년 8월조모 현덕왕후 권씨는 부덕하다고 하나, 이는 옳지 않다. 능호를 운명한권 복구하고, 예를 갖춰 왕후로 예우하라.의릉은 다시 수리되고,현덕왕후는 공식적으로 조선 왕비로 복위합니다.그녀는 죽어서 두번 왕비가 되고, 무너지고 다시 세워진 여인이었습니다.영원한 반쪽, 문종의 곁에 남은 여자현덕왕후 권씨는 살아서 왕비가 되지 못했습니다.하지만 죽어서 문종의 마음속에,조선의 역사 속에 영원히 왕비로 남았습니다.왕이 된 뒤에도 첫사랑만을 왕비로 삼은 남자,죽은 뒤에도 무너진 무덤에서 다시 일어선 여자.그들의 이야기는 조선왕조의 가장 애틋한 비극으로 남아 있습니다.짧았기에, 더 영원한 사랑. 현덕왕후 권씨의 삶​#문종 #단종 #소헌왕후 #현덕왕후 #문종과현덕왕후 #조선사 #조선왕조실록 #세종 #한국사 #한능검 #초등한국사 #중등한국사 #고등한국사 운명한권 #역사블로그 #역사덕후 #한뼘더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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